심상치료 둘째 날이다. 첫번의 치료가 이루어지고 3일만에 다시 치료에 들어갔다.
지난 시간에 응급 상황에 불을 끈후, 더 깊이 뻗은 마음의 길을 따라,
이젠 조금더 구체적인 형태가 드러나는 사람들과, 사물, 풍경, 지난 날의 기억들과 만난다.
첫번째 치료 이후에 "어떠세요?"라는 질문, 난 이 질문이 당혹스럽다.
내가 어떤지 그 상태를 잘 말할 수 있던 적이 별로 없던 것 같다.
더욱이 한 달 전에 연인이라고 믿었던 이와의 이별 뒤에 난 내가 어떤지 잘 모른다.
이제 조금 가라앉기는 했지만, 불이 난 집에서 기어나온 이가 자신이 지금 어떤가를 설명할 수 있을까.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일이 아니다.
이는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낙인찍힌 화살표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나간 미래'라는 말도 있는지도 모른다.
치료 받기 이전에도, 내 머리 속엔 늘 신화의 원형과도 같이 내 삶을 이끌어가는 이들이 살고 있다.
이제 그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세상을 다 산듯한, 가슴을 토해내지 못하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노파와 여린 어린아이,
그리고 살아있는 가족보다도 늘 우리와 함께 있었던 죽은 큰 오빠,
어린 시절, 한번은 그 속에 꼭 들어가보고 싶었던 우물,
꼭 한번은 순례하고 싶은 산티아고 평원 길과 티벳 고원, 너른 바다와 들,
이들 위에서 내 마음이 간다.
여전히 분노하고 이들을 보고, 외로워하고, 다른 이들의 죽음을 보고.
그리고 어디로 가야할지를 끊임없이 물으며.
어린 시절, 난 시골 언덕 위에 오른 꽃상여를 보았다.
그리고 마을에 큰 나무 옆에 있었던 우물을 기억한다.
꽃상여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아직도 원색의 화려한 빛깔을 보면, 난 아주 원색적인 슬픔을 느낀다.
그러나 그를 통해 바라본 '죽음'은 그저 또다른 하나의 세계였다.
우물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난 그 속에 한 번 꼭 들어가고 싶었고 그렇게 되면 어쩌면 죽을 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 시절에 생각하고 체험한 죽음은 결코 무서운 세계가 아니었다.
아궁이에서 활활 타오른 불을 보며, 저렇게 타들어가는 것이 있어 내가 밥을 먹는구나 했던 생각도 난다.
그 위에 올라앉아 있던 도둑고양이(지금의 들고양이)의 퀭한 눈빛 역시 내겐 또다른 세상이었고,
그들은 내가 사는 세계와 다른 세상을 산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
치료를 마치고 어쩌면 난 남다른 '성(sex)'에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이성에 대한 호감이나 관심이 있었지만,
세상의 다른 이들이 성과 결혼 등에 열중하는 시절에
이러한 일들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문득 그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어쩌면 지금에서야 그것을 짧게 경험하고 남들이 오랜 세월 당연한 듯이 겪는 이별과 실연을 지금에서야 맛보고 성장통을 겪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즉, 내게 있어 성은 나의 영적인 영역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었다.
나의 육체적인 질병 역시 그 고통의 시간 속에서 (난 10년 이상을 자궁 질환을 갖고 살았다) 내 나름의 생명을 잉태하려는 욕구를 끊임없이 가졌던 것 같다.
그것이 비록 결혼과 출산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나 역시 한 여성이자,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욕구가 내면 깊숙히 존재했다.
그것이 거부되는 것이 현실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이성과의 사이에서 드러나자,
온 몸을 다해 그에 저항하고자 했던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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